길게 자락을 늘어뜨린 아름다운 산세가 수많은 시가(詩歌)로 읊어지고 회화로 그려져 온 후지산 봉우리. 광대한 산 곳곳에는 격렬했던 분화의 흔적이 남아 있어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Text : Yūji Fujinuma / Korean Version : 김 소현 金 昭賢

Keyword :

일본을대표하는산이지만화산으로는특이한존재

균형 잡힌 아름다운 원추형 모양을 자랑하는 후지산은 세 개의 화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후지산 형성 과정은 수십만 년 전 하코네(箱根) 화산 등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일어난 고미타케(小御岳) 화산 폭발로 시작됩니다. 현재의 후지산 북쪽 사면 요시다구치(吉田口) 5부 능선에 있는 고미타케 신사 부근이 정상에 해당하며 말굽 모양의 화구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이 근처 해발은 약 2,300m이지만 화산 활동이 끝나고 산이 형성되면서 침식되었기 때문에 분화 직후는 더 높았다고 보입니다. 약 8만 년 전에는 남쪽에서 고(古)후지 화산이 분화하여 1만 년 정도 전까지 활동을 반복했습니다. 그 활동은 매우 격렬하여 종종 폭발적인 분화를 동반해 산기슭 일대에 이암류(泥巖流)를 분출 시켜, 남관동(南関東) 지방 일대까지 화산재를 내려, 관동 롬이라 불리는 퇴적물 층이 형성되었습니다. 산이 만들어졌을 때는 3,000m 정도였다고 보이나, 그 후 쇠퇴기의 침식으로 2,700m 정도로 낮아졌습니다. 현재 후지산은 지질학적으로는 신(新)후지 화산으로 불리며 1만 년 전에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후지는 활발하게 용암과 화산재를 분출해 고미타케와 고후지를 뒤덮어 점차 큰 성층화산을 형성해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을 출현시켰습니다. 다량의 용암이 유입된 산기슭 일대는 주변에 생겨난 작은 화산들의 분출물도 퇴적되어 완만한 경사면이 형성되었습니다. 그 뒤 3~4000년 동안 휴지기(休止期)를 거쳐 다시분출을 거듭하면서 지금과 같은 산세가 되었습니다. 후지산은 일본을 대표하는 명산이지만, 화산연구 분야에서는 예외적인 부류에 속합니다. 일본에서는 점성이 강한 안산암질(安山巖質)의 용암 화산이 대부분이나, 후지산은 유동성이 풍부한현무암질의 화산이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모습의 후지산 최고점 “켄가미네(剣ヶ峰)”. 해발 3,776m. 산 정상의 분화구는 직경 약 800m, 깊이 약 200m로 “오하치(お鉢)”라 불린다.

거대지진과관련있는마지막화산활동

유사 이래 후지산의 활동은 계속되어, 에도 시대 중기까지 수십회에 이르는 분화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처음 문헌에 등장한 것은 781년 분화로, 『속일본기(続日本紀)』에 스루가(駿河; 시즈오카(静岡)현의 옛 이름)에서는 재가 내려 나뭇잎이 말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헌에  기록된 800년,  864년,  1707년에 일어난 후지산 분화 활동은 특히 규모가 커서 3대 분화라고 부릅니다. 800년 분화는 산 정상 화구에서 일어났습니다. 낮에는 어둡고 밤에는 화염이 하늘을 태우는날이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천둥소리 같은 굉음과 대량의 화산재가 내렸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토카이도(東海道; 도쿄에서 교토까지 해안선을 따라 나 있는 가도) 아시가라(足柄) 가도가 매몰되고 통행 불능이 되어 2년 후 새로 하코네(箱根) 길이 열렸습니다. 864년 분화는 스루가 쪽의 기록에 따르면, 3번의 지진과 열흘이 지나도 분화 활동이 시들지 않고비처럼 돌을 뿌렸다고 적혀 있습니다. 카이(甲斐; 야마나시(山梨)현의 옛 이름) 쪽은 북서쪽 산허리에서 빠져나간 용암이 세노우미(剗の海; 9세기 중반까지 후지산 북쪽 산기슭에 있던 호수)에 유입되면서 오늘의 모토스(本栖)호수、쇼진(精進)호수、사이(西)호수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1707년 분화가 후지산에서는 마지막으로, 남관동 지방 일대까지  돌과재를 뿌렸고, 지하의 마그마가 퇴적물을 끌어 올려 호에(宝永)산이라 불리는 작은 화산이 생겨났습니다. 분화하기 두 달정도 전에는 토카이(시즈오카(静岡)현, 아이치(愛知)현, 미에(三重)현) 지방에서 발생한 리히터 규모 8강 지진 직후,  산기슭에서 잇달아 지진이 있었고, 2번의 대지진 이후 굉음과 함께 동남쪽 사면에서 연기가 오르고, 이후 2주 이상 활동을계속했습니다. 낙진은 에도까지 이르러 1㎝ 정도 쌓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화 기록은 주로 역사서나 신사와 사찰의 일기류를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만요집(万葉集)』이나 『사라시나(更級) 일기』 등 친숙한 문학작품에도 당시의상황을 전하는 흥미로운 기술이 적지 않다는 것이 연구자에 의해 보고되고 있습니다.

11707년 호에(宝永) 분화 체험자의 기록인 『츠치야 이다유(土屋伊太夫) 분화 사정서』에는 “그 돌의 크기, 차솥이나  큰찻잔만 한 화석(火石)이 장대비처럼 내렸다.” 고 적고 있다. 『부악백경(富獄百景) 첫 편』카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아직도 미지의 매력을 간직한 젊은 활화산

광대한 후지산 기슭에는 장기간에 걸친 화산 활동의 흔적이 넓고 다양한 형태로 점재해 있습니다. 야마나시(山梨)현 쪽북동쪽에서 북서쪽 산기슭에 걸쳐 물을 가득 담은 후지산 다섯 개의 호수는 모두 분출된 용암류에 의해 골짜기나 하천이막혀 생긴 호수입니다. 다섯 호수 모두 충분한 수량을 가진 강의 유입이 없는 것으로 보아 후지산의 복류수(伏流水)를수원으로 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후지산 화산활동의 가장 큰 특징은 용암동굴과 용암수형(樹型)입니다. 용암동굴은 보통 현무암질 용암에서만 형성되며, 일본에서는 후지산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최장은 시즈오카(静岡)현후지노미야(富士宮)시에 있는 미츠이케(三ッ池) 동굴로 2,000m정도나  됩니다. 형성 원인은 유동중인 용암에 포함된 화산 가스가 집합하여 공동(空洞)을 만들고, 이것이 용암이 흐르는 방향으로 차례로 생기면서 연결되어 동굴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용암수형은 수목이 용암류에 둘러싸여 다 타버리고 주위의 용암이 굳어져 줄기에 공동이 생기는 것으로, 서 있는 나무는 세로로 쓰러진 나무는 가로로 구멍이 남아 남습니다. 야마나시현 쪽에서는 직경 3m를 넘는 거대용암수형도 보이지만 1~2m 정도가 보통입니다. 이러한 용암동굴이나 용암수형의 조사는 용암류의 방향과 속도, 점성 계수, 분화 당시의 식물 생육 등을 해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북서쪽 산기슭에 펼쳐진 아오키가하라(青木ヶ原)는 864년분화에 의한 용암류로 형성된 원시림대입니다. 토양이 척박하여 식물 생육에 오랜 세월이 필요했고 지금은 침엽수가 우세한 숲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용암에는 자성이 있는 광물이 포함되어 있어 나침반 자침을 방해해 방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후지산은 젊은 활화산으로 그 활동 메커니즘이 완전히 해명된 것은 아닙니다. 미지의 분야가 많이 남아 있는 후지산의 향후 연구 성과가 기대됩니다.

아오키가하라(青木ヶ原) 주카이(樹海)의 짙은 녹색에 둘러싸인 용암동굴 부악풍혈(富岳風穴). 평균 기온 3℃로 여름에도고드름이 녹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