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원은 선인들의 풍부한 감성이 쌓아 올린 섬세하고 우아하며 아름다운 공간 예술입니다. 대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 창안으로 시대마다 특색 있는 정원 문화를 가꾸어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본 정원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Text : Yūji Fujinuma / Photo : 中田勝康 Katsuyasu Nakata / Korean Version : 김 소현 金 昭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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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아스카 시대】 일본 정원의 여명

고대인들은 거석과 연못, 울창한 숲 등에 신이 깃든 것으로 여겨, 가까이에 그것들을 본뜬 장소를 마련한 것이 일본 정원의 원류로 여겨집니다. 4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미에(三重)현 죠노코시(城之越) 유적에서는 제사 관련 건물지에 나라 시대 이후의 방법으로 통하는 수로와 돌을 배치한 도랑이 발견되었습니다.

불교를 비롯하여 대륙으로부터 다양한 문화가 유입되면서 스이코(推古;재위 592-628)천황 시기에는 백제에서 건너온 도래인이 황궁인 오하리다노미야(小墾田宮) 뜰에 불교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에 빗대어 돌을 배치하고, 아치형 돌다리인 오교(呉橋)를 놓는 등 정원의 면모를 갖추어 갔습니다.

아스카 시대 정원 형태는 스이코(推古)천황 시대 이후에는 백제, 텐지(天智; 재위 668-671)천황 시대 이후에는 신라의영향을 받아 전자는 정원의 연못 형태가 사각형, 후자는 호안(護岸;연못 주변의 무너짐을 막기 위해 쌓는 돌)이 곡선을그리는  연못 가운데 섬을 배치하는 등의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아스카쿄엔치(飛鳥京苑池)나 사카후네세키(酒船石)유적 등에서 정원의 장식적 구성 요소인 석조물을 볼 수 있습니다.

평성궁 동원 (平城京東院; 헤이죠큐 토우인) 정원. 곡선을 그리는 연못 주위에 자갈을 깔고 반도를 배치한 자연 풍경식 정원.

【나라 시대】독자적인 정원 가꾸기의 시작

텐뾰(天平;729-749)문화가 꽃핀 나라 시대. 거리 조성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당(唐)의 영향을 받아 정원 양식도 그 요소를 수용하였지만, 대범한 자연 풍경식을 확립하여 일본 특유의 정원 가꾸기의 길을 열었습니다.

아스카 시대와의 차이점은 굴곡진 연못의 정선(汀線), 호안에 옥석이나 백사를 깔아 해변을 본뜬 스하마(洲浜), 인공 석조물을 대신해 배치된 자연석 등으로 특히 해양 풍경을 재현한 스하마는 나라 시대 정원의 독특한 방식입니다.

대표적 유적으로 평성경 좌경삼조이방(平城京左京三条二坊;헤이죠큐사쿄산죠니보우) 궁터 정원, 평성궁 동원 (平城京東院; 헤이죠큐토우인) 등이 있습니다. 모두 연회를 위한 정원으로 전자는 712년경 만들어져 곡류하는 바닥과 호안의 완사면은옥석으로 깔고 굴곡점에는 조형을 공들인 석조를 배치하여 풍경을 표현했습니다. 후자는 767년경 조성되어 느긋하게 펼쳐진 수면에 완만한 스하마의 정선, 곶의 선단에는 바위가 많은 해안가를 빗댄 석조를 배치하여 해양 풍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헤이안 시대】향연의 공간에서 서방정토 세계로

3면이 푸른 산세로 둘러싸여 수원도 풍족한 수도 평안경(平安京;헤이안쿄). 최상의 조건을 갖춘 이곳이 정원 만드는 기술의 현저한 진보를 촉진했습니다.

당시 귀족들은 대저택의 남면에 넓은 연못을 만들어 용두익수(龍頭鷁首)의 배를 띄워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며 연못에 흘러드는 유수로 곡수연(曲水の宴; 음력 3월 3일에 유수에 띄운 술잔이 자기 앞을 지나기 전에 시가를 읊던 놀이)을 즐겼습니다.

헤이안 시대 후기에는   사회 비관적인 말법(末法)사상이 유행하여  침전조(寝殿造;신덴즈쿠리) 정원에 만다라 세계의구도를 적용한 정토 정원이 발달합니다. 침전은 본당, 연못의 동안(東岸)을 차안(此岸), 서안(西岸)을 피안(彼岸)으로간주하여 아미타당을 세워 극락정토의 현출을 기원했습니다.

또한, 타치바나노 토시츠나(橘俊綱)가 저자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정원 만들기 입문서인 『작정기(作庭記;사쿠테이키)』가 저술되어 당시의 정원 기법을 오늘에 전하고 있습니다.

태사(苔寺;코케데라)’라는 이름으로 사랑받는 서방사(西芳寺;사이호우지) 정원. 이 삼존석(三尊石)은 많은 정원의 모델이 되고 있다.

【카마쿠라 ・무로마치 시대】 선종의 유행과 고산수 정원

무사의 세상이 되고 선종이 성행하자, 자연 지형을 살린 푸른 산들을 배경으로 하는 선종 사원이 세워졌습니다.

카마쿠라 시대 후기에는 임제종 승려 무소우 소세키(夢窓疎石; 1275-1351)가 등장하여, 정원은 수도하는 도량이자 민중에게 선(禅)을 설파하는 교화의 장이라고 주장하며 자연을 교묘하게 수용한 수묵화적 정원은 훗날 고산수(枯山水) 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무로마치 시대의 녹원사(鹿苑寺;로쿠온지)와 자조사(慈照寺;지쇼지) 정원은 기존의 정토식 양식에 선종풍의 요소를 융합한 지천(池泉;정원에 판 연못) 정원으로  키타야마・ 히가시야마(北山・東山) 문화를 대표하는 유산입니다.

오닌의 난(応仁の乱;1467-77) 후, 선종 사원에 물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돌과 백사, 식물로 산수를 표현하는 고산수(枯山水) 정원이 발달했습니다. 그곳은 수행을 위해 서원에 앉음새를 바로잡고 주시하는 좌시 감상의 장으로 자신과 대치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교토 사가노(嵯峨野)의 유명한 천룡사(天龍寺;텐류지) 정원. 방장 대안(対岸)의 석조 용문폭(龍門瀑;류몬바쿠), 중앙의 잉어석이 폭포를 오른다.

아즈치모모야마시대호화정원과와비사비의극소공간

오랜 전란을 이겨내고 천하를 얻은 자는 권력을 과시하듯 대규모 토목공사를 잇달아 일으켰고, 그에 어울리는 호화로운정원이 만들어졌습니다. 그곳에는 예전과 같은 정신성, 종교적 색채는 사라지고 오직 권력자의 유흥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 서원조(書院造;쇼인즈쿠리) 정원에는 불로장생을 기원하며 학구봉래(鶴亀蓬莱)를 표현하는 호쾌한 석조와 엄선된 명석을 배치했습니다.

한편, 다도의 유행과 함께 다실이 만들어지고 그곳에 이르는 정원인 노지(露地) 양식도 확립되었습니다. 노지는 차정(茶庭)이라고도 하는데, 한정된 극소 공간에 와비사비(侘び寂び)의 무상함이 운치를 더하여 심산유곡의 정취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지 양식의 완성자는 센노리큐(千利休;1522-91)라고 합니다.

카가(加賀;현 이시카와(石川)현) 마에다(前田)가문의 정원인 겸륙원(兼六園;켄로쿠엔), 카스미가이케(霞ヶ池) 북쪽에 서 있는 상징물. 곡수가 이 부근에서 연못으로 흘러든다.

【에도 시대】각 시대의 요소를 집대성한 다이묘 정원

에도 막부가 열리고 에도에 저택을 가진 다이묘(大名;쇼군에 직속된 봉록1만 석 이상의 무가)가 만든 정원은 쇼군(将軍)과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사교의 장이었습니다. 그 규모가 커서 뱃놀이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연못을 중앙에파두고 그 주위를 돌며 관상하는 지천회유식(池泉回遊式)을 기본으로, 중국의 서호(西湖)나 일본의 삼경(三景) 등 자연경관을 본뜬 축경(縮景)도 꾸몄습니다. 유력 다이묘는 자신의 영지에도 웅장하고 수려한 정원을 가꿨습니다.

교토에서는 수학원(修学院;슈가쿠인) 별궁 등과 같이 귀족들이 가꾼 고아한 정원이 조성되었습니다. 에도 시대 중기 이후에는 부유한 상인 사이에서도 정원 만들기가 유행하는 한편, 폭이 좁고 긴 상인의 가옥에서는 좁은 공간을 이용해 안채에 정원을 만드는 평정(坪庭; 츠보니와)이 보급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고보리 엔슈(小堀遠州; 1579-1647)가 등장해, 오늘날에도 다수 남아 있는  유명한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고미즈오(後水尾;재위1611-1629) 상황의 별장으로 조성된 수학원(修学院;슈가쿠인) 별궁의 정원.

【메이지·타이쇼 시대】서구화와 일본 정원의 신조류

급속한 서구화는 일본의 전통문화를 경시하는 듯한 풍조를 낳아, 서양식 기법과 디자인을 도입한 일본과 서양을 절충한정원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에도에서는 많은 다이묘 정원이 소실되어 파손을 면한 극히 일부 정원이 공원으로 개방되어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래의 정원 양식을 원하는 요청도 많아, 거기에 응한 것이 오가와 지헤(小川治兵衛;1860-1933)였습니다. 그는 정원의 연못과 물흐름을 중심으로 배후의 자연과 정원 내 경치가 연속적으로 펼쳐지고, 밝고 개방된 잔디광장, 숲 사이에접한 다실 등 완전히 새로운 감각으로 당시 정재계인의 별장 정원을 꾸며,  일본 정원의 근대화를 이끌었습니다.

또한 소실되거나 오랜 세월 방치된 낡은 정원에도 눈을 돌려, 메이지 시대 말기에는 다도 유파의 하나인 오모테센케(表千家)의 다실 정원 등을 보수했습니다.

시게모리 미레이(重森三玲;1896-1975)의 걸작인 동복사(東福寺;도호쿠지)의 ‘이치마츠(市松) 정원’. 현대 일본 정원의 탄생을 상징한다.

【쇼와・헤이세이 시대】참신한 발상에 의한 다양한 시도

일본 정원에서도 대담한 주장과 시도가 현저해졌습니다. 특히 시게모리 미레이(重森三玲,1896-1975)는 화도(花道;꽃꽂이)와 다도에도 능통하고, 옛 시대의 기법을 존중하면서도 참신한 발상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열어, 보수 작업을 포함해200 작품 가까이 남겼습니다.

해외를 겨냥해서는 만국박람회 등에서 인지도를 높여 서구의 주요 도시에서도 일본 정원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발굴 조사를 토대로 복원도 하여 평성궁  (平城京; 헤이죠큐) 터 등에서 귀중한 정원 유적이 옛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헤이세이(平成;1989-2019) 시대에 들어서서 지구 온난화와 도시 지역의 열섬 현상 등의 완화책으로 건물 외부 공간이나옥상의 정원화가 시도되고 있습니다.